Nov 19, 2009

놀랍다 못해 두려운 미 인재선발


연말마다 로즈장학생 선발위원회는 미국 내 합격자 30여 명의 명단과 간단한 약력을 웹사이트에 공개한다. 이걸 읽어보면 만 22세의 학생들이 이런 방대한 활동을 어떻게 고된 학업과 병행했는지 놀랄 수밖에 없다.

#클래라 블래틀러. 하버드대 지구과학 전공 4년생. 아이비리그 장대높이뛰기 챔피언. 바이올린과 피아노 연주자. 남미 아프리카 유럽에서 폭넓은 해양학 연구.

#애덤 레빈. 다트머스대 4년생. 미술사 수학 사회과학을 동시에 전공. 기하학을 역사 미술 고고학 분야에 적용하는 연구. 라이트 헤비급 복싱선수. 고전학 전공 계획.

#스콧 톰슨. 스탠퍼드대 졸업. 정치학 심리학 전공. 뉴욕 브롱크스의 흑인 빈민가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 학부생을 위한 논문집을 창간(편집인). 사회복지정책 연구 희망.

미국 명문대에서 음악과 육상, 공부를 병행하는 게 어떤 것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루 3∼6시간은 혹독한 연습에 몰두하면서도 지친 몸을 이끌고 틈틈이 책을 읽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운동선수가 땀에 흠뻑 젖은 채 라커룸에서 책을 읽는 영화장면은 상상의 산물만은 아니다.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뒤 실리콘밸리나 월스트리트가 아닌 마약 총기 폭력에 찌든 대도시 저소득층 초등학교의 문을 두드린다는 결심도 쉽게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19세기 말 괴팍한 영국 사업가 세실 로즈는 영어권 국가의 젊은 인재를 미리 눈여겨봤다가 옥스퍼드대에서 2, 3년간 공부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고풍스러운 옥스퍼드대 캠퍼스에서 젊은 날의 추억을 만든 친영파 지도자들을 확보하는 게 영국의 국익에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 이 장학제도는 탄생했다.

그는 육필로 네 가지 선발기준을 제시했다. ‘공부 잘하는 건 당연하다. 발군의 리더십 자질과 도덕적 힘을 갖춰야 한다. 탁월한 운동 실력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이런 기준은 100년이 흐른 지금도 유효하다.

이 기준에는 어떤 자질을 갖춰야 인재인지를 판단하는 영미권의 철학이 녹아 있다. 나아가 이 기준은 자녀를 이렇게 키우라는 가이드라인 역할도 한다.

2006년 하버드대가 공개한 통계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2만 명에 가까운 지원자 중 약 3200명이 대학수학능력시험(SAT)에서 만점을 받았고, 약 3000명이 출신 고교를 1등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합격자는 1600명 선.

미국 대학은 냉정하다 못해 지독할 정도로 학교의 발전을 꾀한다. 동시에 졸업생이 훗날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기를 바란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고3 생활에서 매주 5시간씩 저학력 초등학생의 수학공부를 도와줬다면? 친구들이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학생회 대표로 학내 행사 개최를 위해 모금행사를 기획했다면?

이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자기희생을 선택한 학생들이라면 SAT 점수가 만점에 못 미치더라도 대학 졸업 후 동료들의 귀감이 되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대학은 판단한다.

1980년대 입시를 치른 기자는 “학교에서 1등이 사회에서 1등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지만 공부하기 싫은 누군가의 핑계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장보다 업무능력과 리더십, 인성이 압도적으로 중요해지는 40대에 접어들면서 그 말의 묵직한 의미를 깨닫고 있다.

이제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내 아이들에게 흘려듣지 않도록 설명해야 할 차례가 된 것 같다. 그리고 한국의 입시제도가 지금처럼 ‘성적만이 전부’에서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 다음이어야 할 것 같다.

김승련 워싱턴 특파원 srkim@donga.com

- 동아일보 08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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